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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ne Magritte (3) 파편화된 신체

백인종, The White Race, 1967년

<백인종>(65쪽)은 인간 몸에 대한 놀라운 시각을 보여주면서 새로운 가치들의 위계체계를 수립한다. 눈과 귀가 각각 하나뿐이다. 말을 하는 기관인 입과 마찬가지로 눈과 귀가 단 하나인 것이다. 키클롭스처럼 단 하나인 눈은 가장 위쪽에 있는데, 그 두드러진 중심적 위치가 초월감을 불러일으킨다. 눈은 귀 위에 있다. 차례로 귀는 입에 의해 지탱되고 있다. (그림의 기관인) 눈, (소리의 기관인)귀, 그리고 (말고로스의 기관인) 입은 두 개의 코에 의해 지지된다. 이 코들은 다리로 여겨질 수 있다. 이들이 사실상 남아 있는 몸을 구성하고 있는데, 서로 다른 다양한 감각들이 하나의 블록, 하나의 받침대로서 이용되고 있다. 

<강간>과 <백인종>은 감각기관들 사이의 총체적이고 아주 근본적인 불화라는 인상을 준다. 이것은 각 감각기관(먹고 마시고 말하고 핥고 입맞춤 하는 입, 보고 읽고 음미하고 상[像]이 비치고 욕망이나 경멸, 분노나 애정을 표현할 수 있는 눈)만이 아니라, 감각기관들 사이의 관계(눈은 젖가슴이 될 수 있고, 입은 성기가 될 수 있으며, 또는 코가 배꼽이 될 수 있는 등)에 대해서도 그러하다. 몸의 각 기관들 사이의 이러한 유동성-기능과 감각을 바꿀 수 있는 능력-은 근본적으로 해부학 법칙과 법적 정체성과는 전혀 다른 인간 몸의 개념을 암시한다. 마그리트는 몸을 다중적으로 분열되어 있는 -서로 맞지 않는 조각들로 이루어진 퍼즐처럼 단편적이고 파편화된-것으로서, 다양한 가능성의 영역으로서, 그리고 본질적으로 가장 이종(異種)적인 능력들, 즉 서로 이질적이고 변화하고 충돌하는-그리고 때로는 무시하는-감각들의 장소로서 묘사하고 있다. 그가 모교하는 바는 몸의 친숙한 조화나 통합이라기보다 몸의 통합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예술의 가능성에 있다. 

계속해서 정체를 바꾸는 팡토마의 예를 따라서, 이제 마그리트는 사회문화적 정체성으로부터 벗어나는 능력을 몸에 부여한다. 그것으로 우리의 문명세계가 제작하곤 했던 몸의 그림을 부정한다. 서양의 사상가들은 소포클레스와 플라톤 이래 시각이 권력을 형성한다고 믿어왔다. 시각이-신처럼-다른 감각들을 지배하며, 다른 모든 감각인식을 제어하면서 몸을 통제한다. 이러한 테오리아('이론'을 뜻하는 라틴어로, 인간의 영혼이 모든 편견을 없앤 순수한 상태에서 대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관조 정신을 지칭하는 말 - 옮긴이), 즉 시각의 우위는 철학의 역사에서 거의 예외 없이 아무런 도전도 받지 않은 채 유지되었다. 이는 마그리트가 열렬히 읽었던 저자들,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 데카르트의 '명석하고 판명한 관념',-감성을 직관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생각하는 한에서-칸트, 또한 마침내 후설에서 하이데거에 이르는 현상학에 의해 명백해진다. 요컨대 시각적 요소에 대한 강조가 계속해서 상당히 증가해온 것이다. 우리는 영상의 세계, 스펙터클의 세계에 살고 있다. 시청각 예술은 다른 것보다 더 청각과 시각 사이의 균형을 유지하고, 혹은 이 두 영역 사이에 조화로운 관계를 수립해야한다. 하지만 그들조차 사실은 사려분별 없이 시각 요소에 중요성을 둔다. 따라서 <백인종>의 아주 명백한 특징은, 소리('말씀')가 지배하는 마그리트 자신이 태어난 문명과는 아주 다르게, 역시 그가 제의한 미세한 차이들의 선택적인 위계체계다. 마그리트는 이 그림과, 이탈리아의 본빈치니(Bonvincini)와 베로칼(Berrocal)의 작업실에서 만든 조각을 통해, 감각들 사이의 불균형에 대한 관심을 이끌어내면서, 수정되고 무효화될 수 있는 감각들 간 관계에서 한 가지 가능한 형태를 확립해 보여준다. 

따라서 <백인종>이 표현하고 있는 것은 감각들의 위계체계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하지만 이에 더하여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다른 구성의 가능성이 또한 존재한다. 감각 지각은 자기충족적인 단 하나의 감각만으로 일어나지 않는다. 보고 듣고 느끼고 맛보고 냄새 맡을 수 있는 다양한 것들에 열려 있는 감각들 전체를 통해서 일어난다. 따라서 예술작품이 감각 지각을 야기하는 한, 그것은 사람들이 전통적으로 주장하는 것처럼 그렇게 고립적이고 자기충족적이지 않다. 이를 이해한 베로칼은 피카소를 따라서, 조각 소유자가 말 그대로 수없이 변화를 줄 수 있는 일련의 조각들을 선보였다. (후략)
영원한 증거, Eternal Evidence, 1930년

 따라서 회화는 현실을 수동적으로 비추는 거울이 아니다. 그보다는 대상의 가시적 현시를 배가하면서 대상을 변화시키고 변형한다. 따라서 회화는 여성의 몸을 그대로 재현하지 않는다. 대신 정반대의 일을 한다. 새로운 현시, 즉 파편적이고 고정되고 틀지워지고 생기 없는 그림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마그리트의 작품에 관한한 새롭고 불성실한 대상의 현시는 예술에 의한 공헌을 잘 의식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마그리트의 그림은 외관을 변형해서 그것들을 가상화한다. 동시에 그는 이러한 변형의 의미를 반성한다. 


휴식시간 Intermission, 1927/28년


곡예사의 훈련, The Acrobat's Exercises, 1928년


라캉의 거울단계

6개월에서 18개월 사이에 아이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이미지를 인식하기 시작하는데, 아이는 자신의 신체를 파편화되어 통합되지 않은 부분들로 느끼는 반면 이미지는 아이에게 통합된 전체로서의 감각을 제공한다. 이때 중요한 것은 아이가 이 거울상과 자신을 동일시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이미지는 그것과 자기를 혼동하게 된다는 의미에서 소외적이다. 통합된 자기에 대한 감각은 자신이 타자가 ―즉 우리의 거울상이― 되는 대가를 치르며 획득 된다.(자아는 타자다)

 

자아는 이미지들의 효과이다. 요약하면 그것은 상상계의 기능이다. 자아란 통일성과 숙달된 느낌을 주는 환영적 이미지에 근거한 것이며 이러한 연속성과 통솔감에 대한 착각을 유지시키는 것이 자아의 기능이다. 즉 자아의 기능은 오인의 하나이다.

 

통일된 이미지가 파편화된 경험과 대치되는 순간부터 주체는 자신의 경쟁자가 된다. 아이가 가지는 자기에 대한 파편화된 느낌과 자아를 탄생시킨 상상계적 자율성 사이에서 갈등이 초래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존재의 보증인으로서의 타자에게 의존하는 동시에 그 동일한 타자와 격렬하게 경쟁한다.

 

거울단계를 통하여 아이는 자신의 신체에 대하여 통솔력을 획득했다고 상상하지만 그것은 자신의 외부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소외란 정확히 이러한 ‘존재의 결여’이며 이를 통한 아이의 인식은 다른/타자적 장소에서 진행된다.


숀 호머라캉 읽기, 은행나무, 2010, 39~6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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